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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 삼사성지순례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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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30 14:12 조회4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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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갑사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中 서악(西嶽), 고려시대엔 묘향산(妙香山) 상악(上嶽), 지리산 하악(下嶽)과 더불어 3악중(三嶽中) 중악(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계룡산(鷄龍山)의 서편 기슭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갑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탑이다. 그 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挑李寺)를 창건(創建)하시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찿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이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천불전(天佛殿)과 보광명전(普光明殿)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국중대찰(國中大刹)로 크게 번창되었다. 887년(진흥왕 원년)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 사승(寺僧)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1654년(효종5년)에는 寺僧 사정 신징 경환 일행 정화 균행 등이 중수하였으며,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1875년(고종12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고,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로써 그의 활약상은 범우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관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 의 말로써 충남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반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미륵부처님의 성지이다.

관촉사가 자리잡은 논산에는 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그중 염라대왕의 설화는 유명하여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다. 예로부터 전해오길 염라대왕은 저승에 논산사람들이 오면 물어보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개태사의 가마솥"과 "강경의 미내다리" 그리고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만큼 논산의 유명한 보물이기에 전해오는 말이다. 그중 단연 논산제1경에 꼽히는 것이 ‘은진미륵 부처님’이다. 은진미륵부처님의 가피가 살아쉼쉬는 천년미륵도량 관촉사이다.

관촉사의 미륵부처님을 은진미륵이라 부르는 것은 예전 논산지역은 은진과 노성으로 크게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바로 관촉사 미륵부처님께서 계신 지명이 ‘은진’이었기 때문이다. 관촉사(灌燭寺) 은진미륵(恩津彌勒) 부처님은 서기968년 고려 광종때 모셔진 것으로 전해온다. 전해오는 창건 설화에 의하면 한 여인이 관촉사가 자리잡은 반야산(盤若山)에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가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산속에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가 이상하여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바위에서 아이 울음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이 소문은 고려 조정에까지 퍼졌고 광종(光宗)은 당시 최고의 고승이었던 혜명(慧明)을 불러 그 바위로 불상(佛像)을 만들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은진미륵 부처님께서 자리잡게 되었고 관촉사가 창건하게 되었다.

38년간에 걸친 불사가 완성되고 1006년(목종)에 드디어 높이 18.1m 둘레 11m 귀의 길이만 해도 3.3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불상이 968년 모셔졌다. 그때 미륵부처님의 미간의 백호 수정(水晶)에서 찬란한 빛이 발하여 중국 宋나라에 까지 이어졌으며 그곳의 지안(智安)이라는 고승이 빛을 따라 찾아와 배례한 뒤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라고 하면서 사찰 이름을 관촉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화재로서는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보물218호) 석등(石燈보물제232호) 연화배례석(蓮花拜禮石) 사적비(事跡碑) 관음전, 삼성각, 석조(石造) 해탈문(解脫門) 등이 전해오고 있다.

개태사

계룡시 두마면과 가까운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天護山)에 있는 사찰로 개태사 홈페이지에 의하면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하는 사찰이다. 그러나 향토문화 대사전에서는 법상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개태사 경역은 크게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현재 삼존불을 모신 극락보전과 요사체가 있는 지역으로 사찰이 운영되는 현재의 개태사 지역이고, 다른 한 지역은 이 지역에서 동북으로 약 300m정도 떨어진 마을에 있는 유구인데, 이곳이 고려 태조의 진영(眞影)을 모셨던 건물지이다. 현재의 개태사 주변과 윗마을 일대에는 광범위하게 건물의 초석과 기단들이 널려 있어 사역이 원래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개태사가 있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은 계백장군 휘하의 백제 결사대가 장렬하게 산화한 ‘황산벌’이다. 이곳에는 계백장군의 것으로 전하는 무덤이 있다.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 싸움으로부터 276년이 지난 936년 이곳에서는 후백제와 고려가 맞붙게 된다. 이 전쟁에서 승리로 후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한 고려 태조 왕건은 황산의 이름을 ‘하늘의 가호를 내려준 산’이란 뜻의 천호산(天護山)이라 바꾸고 개태사를 지었다.

후백제 왕인 신검의 항복을 받고는 곧바로 사찰 불사를 착공하여 4년 남짓한 공사 끝에 태조(왕건) 23년(940) 낙성법회를 열었다. 창건 당시 이 사찰의 사치스러움은 극에 달하였고, 태조가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다. 그 뒤 태조의 영전(影殿)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 후 아쉽게도 고려 말 허구한 날 왜구가 침입해 노략질과 약탈과 방화가 계속되어 견디다 못한 나머지 결국 폐사가 되고 말았다,1934년 김광언이라는 여승이 개태사지에 매몰되어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세우고 사찰을 중건하여 도광사(道光寺)라 하였다가 그 뒤 다시 개태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대보전과 요사채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9호인 석불입상과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철확(鐵鑊),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오층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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