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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기원 그리고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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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22:47 조회5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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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기원 그리고 서원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원하고 바라는 것을 소원이라고 한다.

소원은 다른 말로는 소망(所望)이라고 한다.

소망과 소원 속에는 중생들의 탐, 진, 치, 삼독심이 들어있다.

소원(所願)의 소(所)는 일정한 지역이나 위치, 자리 지위 등을 나타내는 한자(漢字)이다.

전체 구성원들의 이익을 배려하고 추구하는 객관적이기보다는

타인, 타조직의 이익을 배제하고 자기조직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자기개인의 욕망을 우선 채우려는 제한적이고 주관적경향이 강하게 내재(內在)되어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등 서양에서 출발한 종교가 그렇다.

자기종교가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고 적대시 한다.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우리속담에 “평생소원이 누룽지” 라는 말이 있다.

단체보다는 개인을 전체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원(所願)의 한계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전체의 이익을 두고 볼 때 개개인의 이익이나 일개집단의 소망이나 소원은 너무나 하찮은 보잘것없는 것임에도 사생결단(死生決斷)하는 것을 두고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권력도 명예고 금력(金力)도 크고 넓은 광대무변의 우주 진리로 보면

일시적 바람에 불과한 것이다.

밤을 새워가며 풀잎에 힘들어 맺힌 이슬이 아침이면 사라지는 것처럼 범부중생의 탐, 진, 치 삼독이 만들어낸 소원(所願)역시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의 한평생이 초로(草露)인생인 것이다.

강한 배척과 지나치게 이기적이면 광신(狂信)으로 발전한다.

다른 종교인들을 멸시하고 타종교 시설을 무차별 파괴하기도 한다.

소원과 비슷한 뜻의 말로는 기원(祈願)이라는 말이 있다.

기원은 자기의 소원을 천지신명(天地神明)에 구(求)하는 것이다. 자기의 바라는 소원을 신(神)들에게 빌어 바람을 성취하는 것이다. 제물(祭物)을 받치고 복(福)을 얻는 기복(祈福)신앙(信仰)이다.

힌두교 유교 도교를 비롯한 동양에서 발생한 종교들이 그렇다.

용왕(龍王), 산신(山神), 칠성(七星), 무속신앙도 여기에 속 한다.

대체로 삶이 힘들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들이 성행(盛行)한다.

중생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이용하여 수준미달의 사람들까지 가세(加勢)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날뛰고 설치고 판을 쳐

더욱 더 세상을 어지럽힌다.

한때는 미신(迷信)이라고 하여 정부차원에서 추방하기도 했다.

복(福)을 비는 기복(祈福)행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옛날에는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정초되면 그해 한 해 동안 동민들의 무사태평(無事泰平)과 명(命)과 복(福) 기원(祈願)하는 동제(洞祭)나 당산제(堂山祭)올렸다.

강(江)이나 바다에 나아가는 선박과 선원들의 무사안녕(無事安寧)과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해 달라 빌며 풍어제(豊漁祭)를 올린다.

오랜 가뭄에 지치고 시달린 농민들이 제발 비(雨)를 좀 내려주십사 하고 올리는 기우제(祈雨祭)도 있다.

모두가 마을 전체나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합심 단결하여 올리는

대표적 기원(祈願)의 제(祭)이자 방법이다.

이러한 기원 제(祭)는 청정(淸淨)과 정성(精誠)을 우선으로 한다.

아무나 제(祭)주(主)가 될 수가 없다.

제(祭)를 앞두고는 부정(不淨)을 방지하는 금줄을 쳐 잡인(雜人)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제주는 한 달 이상을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지극한 정성을 다 기우린다. 물론 제물도 순수하고 깨끗한 것으로 마련한다.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구(求)하기도 하고 또한 마을을 비롯한 집단(集團)의 태평성대 (太平聖代)와 타인의 명(命)과 복(福)을 빌어주는 기원(祈願)은 모든 종교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기원은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다.

신앙의 본질을 살리는 긍정적이기보다는 기복(祈福)에 대한 지나친 바람으로 부정적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문제되는 것은 기원(祈願)중에서도 소원(所願)과 마찬가지로

탐, 진, 치 삼독의 중생심을 깊숙이 담고 있는 기원(祈願)에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별별 희한한 도사(導師)임을 자처한다. 신통방통한 잡신(雜神)을 다 만들어내고 온갖 수작방법을 다 동원하여 유언비어를 만들고 퍼뜨린다.

심지어는 언론까지 동원하여 감언이설(甘言利說) 로 중생을 유혹하고 과도한 재물(財物)을 뜯어내는 갈취(喝取)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어리석은 중생들이 이들의 사기술수에 빠져들어 재산을 탕진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몸까지 받쳐가며 패가망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것이다.

그래도 자기재산 버리고 자기가정 파괴하는 이 정도는 괜찮다.

아무 죄 없는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남의 목숨마저도 끊어놓는 악업(惡業)도 서슴지 않고 감행한다.

옛날에는 어지간한 기원 제(祭) 제상(祭床)에는 명태 말린 북어를 많이 올렸다. 그 후 경제가 좋아지면서 돼지머리로 바뀌더니 요즘은 쇠머리로 바뀌었단다.

그것도 모자랐든지 요즘은 삶은 돼지머리나 쇠머리가 아니라 생피가 철철 흐르는 생(生)머리를 쓴단다.

옛날에는 기원 제(祭)를 올리고 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사에 쓴 돼지머리를 안주삼아 음복(飮福)을 하는 재미도 있었다.

복(福)을 같이 빌고 같이 나누는 아름다운 풍속이기도 했다.

요즘은 다른 사람 몰래 제(祭)를 올리고 아무도 몰래 아무 곳에나 내버린다. 굿판이나 기원 제(祭)는 풍광이 뛰어난 올린다.

기원 제(祭) 올리기 좋은 어지간한 명승지에는 돼지머리 쇠머리 썩는 악취가 진동을 한다. 엄청난 낭비요, 엄청난 자연파괴 행위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다. 방생(放生)한답시고 무분별하게 외국어종을 수입하여 풀어놓는 바람에 생태계가 무너졌다.

외제(外製)하면 꾸벅 하는 철없는 백성이라 외국에서 뱀도 잡아먹는 황소개구리를 수입하여 방생하더니 수명장수(壽命長壽)를 기원한다며 붉은 귀 청 거북이를 수입 방생하여 토종 물고기를 씨를 말린다. 이외에도 귀한 외화(外貨)를 낭비해가며 수입 방생한 수입어종 베스, 부루길 등의 성화에 토종 어종이 전멸의 위기에 빠져든 것이다.

이게 살생(殺生)이지 무슨 놈의 방생(放生)인가?

모두가 탐, 진, 치 삼독(三毒)의 중생심이 만들어낸 비뚤어진

한심한 기원(祈願)의 안타까운 부산물들이다.

흔히들 기원(祈願)을 불교의 기도 방법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바라는 원(願)을 서원(誓願)이라고 한다.

서원은 부처님과의 약속이자 본인과 와의 맹서(盟誓)이다.

“맹서하여 원(願)을 세움,

보살이 수행의 목적과 원(願)의 바람(望) 밝혀서

그 달성을 서약(誓約)하는 것“ 이 서원인 것이다.

중생무변 서원(誓願)도: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 서원(誓願)단: 번뇌를 다 끊어 오리다.

법문무량 서원(誓願)학: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 서원(誓願)성: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대표적인 서원은 불자라면 다 아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서원(誓願)을 알려고 하면 우선 염원(念願)을 알아야 한다.

염원은 마음에 간절히 생각하고 바람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걱정에 대한 종합 백화점식의 자질구레한 바람은 염원이 될 수가 없다.

염원은 일구월심(日久月深)오직 한마음 지금현재의 바램이다.

중생의 바람은 한도 없고 끝도 없다.

모든 것을 다 즐기고 다 소유하고 다 지배하고 싶어 한다.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끝없는 욕망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다 업(業)의 장애(障碍)임을 깨달고

과감히 벗어 던져버리고 한 가지 바람에 매달려야 한다.

이것이 염원인데 올바른 염원은 꼭 이루고자하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로 하는데 이를 비원(悲願)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님의 법장비구가 중생구제라는 염원을 가지고 48원(願)을 세워 온갖 고난과 고통의 장애를 비장한 각오로 수행하고 극복하여

마침내 부처를 이루는 아미타불의 48원(願)이 비원인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10대원(願)과 약사여래불의 12대원(願)처럼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자비심에서 우러난 원(願)도 여기에 속한다. 모든 불(佛)보살님들은 모두 비원(悲願)을 가지고 있다. 중생구제라는 원대(遠大)한 원(願)을 세우고 비장한 각오로 수행하고

실천함으로 불(佛)보살님이 되신 것이다.

중생들이 원(願)을 세우는 것을 발원(發願)이라고 한다.

바닷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처럼 원래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증득하기 전에는 중생이고 중생도 무두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는 발원(發願)에 따라 달라지고 비원(悲願)에 따라 차별이 생겨난다. 발원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비원이 얼마나 구체적이냐? 에 따라서 부처가 되기도 하고 중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잘못된 비원(悲願)은 불쌍히 보고 도움주길 슬픈 소리로 간절히 바람을 하소연하는 애원(哀願)이 될 수도 있다.

한자(漢字) 비(悲)와 애(哀)는 “슬프다” 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悲)는 남을 불쌍히 본다는 뜻이고 애(哀)는 나를 불쌍히 본다는 뜻이다. 비(悲)는 남을 불쌍히 보고 도와주고 구제한다. 는 비원(悲願)의 뜻이다.

애(哀)는 본인 스스로를 불쌍히 보고 남의 도움을 바라고 남이 나를 구원(救援)해 주기를 애걸복걸(哀乞伏乞)하는 애원(哀願)의 뜻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처한 딱한 사정을 말하고 남이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매달리는 탄원(歎願)이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애원과 탄원은 발원이라고 할 수가 없다.

애원(哀願)은 남에게 불쌍히 보여 바람을 구걸(求乞)하는 원(願)이고

탄원(歎願)은 남에게 자신의 억울하고 딱한 처지를 하소연하여 남으로 부터 구제 받고자하는 피동적(被動的)인 원(願)이 되는 것이다.

이래서는 올바른 발원(發願)이 될 수가 없다.

불자(佛子)들의 원은 청정하고 당당하고 위대(偉大)해야 한다.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하여 자신을 내던져 희생(犧牲)하고자하는 비장한 비원(悲願)과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오직 중생구제(救濟)만을 생각하는 위대한 원(願)을 발원(發願)해야 불(佛)보살이 되는 것이다.

이를 대원(大願)이라고 한다.

비원(悲願)을 수행 실천하는 불(佛)보살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 구고구난(救苦救難) 관세음보살님이시다.

“중생이 갖가지 공포와 번뇌로 고통 받고 고난에 빠져들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만약에 나를 염(念)하고 나의 이름을 칭한다면

나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천개의 귀를 가지고 들을 것이며

천개의 눈을 가지고 살펴보아서 천개의 손으로 그들을 구제할 것이다.

만약에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고통과 번뇌 망상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영원히 성불하지 않겠다“.

비화경(悲華經)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서원(誓願)의 내용이다.

관세음보살은 보살도를 수행할 때 이처럼 지극한 원을 세운 것이다.

“만약 갖가지 고통 받는 백천만억의 무량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칭명하면 관세음보살은 곧바로 그들의 음성을 관하여 해탈케 한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한 구절이다. 관음신앙의 위대한 가피와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에게 베풀어주는 주는 현세의 이익(利益)적 염원(念願)을 나타낸 석아모니부처님의 말씀이다.

관세음보살은 32응화신(應化身) 14무외력(無畏力) 4부사의덕 (不思議德)의 위신력(威神力)과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있다.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32가지 모습으로 변화하여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신다. 14가지의 무외력(無畏力)으로 불(火), 물(水) 감옥 등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신통력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하려면 우선 중생을 부처님의 품안으로 인도해야 한다.

중생 속으로 파고들어 중생을 교화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불법(佛法)의 진리를 설(說)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發心)을 일으키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청원(請願)이다.

청원은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진리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전달하는 전법(傳法)이자 대(大) 회향(回向)심을 말하는 것이다.

대원(大願)을 수행(修行)실천하는 불(佛)보살님은 지장보살님이시다.

불자들은 지장보살을 흔히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고 부른다.

지장보살은 처음 발심자체 부터가 오로지 중생구제에 있었다.

아비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어 중생을 교화하고 해탈시킨다.

지금까지 지장보살님이 구제한 중생은 가히 수자로는 헤아릴 수 없는 불가칭(不可稱)불가설(不可說)의 중생이라고 지장보살 본원 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설(說)하고 계신다.

지장보살은 부처님과 같은 경지의 삼매(三昧)와 무생법인 (無生法印)을 증득(證得)하고도 아직도 성불(成佛)하지 않고 보살로 남아 중생들을 제도 하고 있다. 한사람이라도 지옥중생이 있으면 성불을 뒤로 미루고

그 중생을 구제한다는 큰 대원(大願)을 세우신 것이다.

지장보살은 때로는 지옥문을 지키면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중생들을

못 들어가도록 막는다.

때로는 염라대왕의 몸으로 때로는 옥졸의 몸으로 나투어 지옥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교화하고 구원(救援)해 낸다.

때로는 아예 지옥 그 자체를 부수어서 모든 지옥중생들을 구제하고 극락으로 인도하게도 한다.

이모두가 지장보살의 본원력 대원(大願)에서 나오는 것이다.

보살이 남의 원(願)을 빌어 주는 것,

보살이 남의 원(願)을 해결해 주는 것을 축원(祝願)이라고 한다.

축(祝)은 빌다, 라는 뜻과 함께 부처님(佛)나 신(神)을 섬기는 일을 업(業) 으로 하는 사람, 남자무당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이나 신(神)을 모시는 사람이 남의 원(願)을 빌어주거나 구제해주는 것이 축원(祝願)인 것이다.

오직 한마음의 염원(念願), 비장한 각오의 비원(悲願),

혼자만의 바람이 아닌 전체의 바람을 위한 대원(大願),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거나 걸림 없는 발원(發願),

중생구제를 위해 중생 속을 파고들어 인도하는 청원(請願),

중생의 바람을 빌어주고 들어주는 축원(祝願)

모두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다짐하는 맹세를 말한다. 불교는 부처나 보살에게 바람을 구(求)하는 소원(所願)이거나 바람을 비는 기원(祈願)아니다.

불(佛)보살에게 울고불고 매달려 불쌍하고 가련하게 보여 바람을 구걸하는 애원(哀願)이거나 딱하고 얼울함을 호소하여 바람을 얻어내는 탄원(歎願)이 아니다.

불교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부처나 보살의 대원이 이루어지도록 서원하는 것이다.

불교는 중생과 더불어 불국정토를 만들고 모두가 모두를 위하여 서로 회향하는 회향(廻向)의 종교인 것이다.

원이차(願以此) 공덕(功德) 원공법계(願共法界) 제중생(諸衆生) 자타일시(自他一時) 성불도(成佛道)

원하옵건대 이번 이글을 쓴 공덕으로 우주법계의 일체중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부처를 이루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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