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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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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3-17 22:44 조회5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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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의 노래

재가 법사가 사찰을 운영하기는 몹시도 힘이 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사찰을 찾는 불자(佛子)님들에게는

머리를 가지고 있는 재가법사는 아직은 아마추어로 보이는 모양이다.

머리를 깎고 하는 불교가 쉬운가?

머리를 가지고 하는 불교가 쉬운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머리를 깎고 하는 불교가 쉽다고 대답할 것이다.

부처님은 다른 종교의 교주(敎主)님들과는 달리 중생(衆生)들의

수준(水準)을 모두다 간파(看破)하셨다.

근기(根器)를 인정하시고 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베푸신 것이다.

성경(聖經)이나 코란이 간결(簡潔)한 가르침인데 비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8만(萬) 4천(千)이나 된다.

중생의 근기(根器)를 8만(萬)4천(千)으로 보고 근기(根器)에 맞추어

8만(萬)4천(千) 법문을 설(說)하신 것이다.

출가스님들이 수도(修道)하는 경전과 재가불자들이 수행(修行)하는

경전(經典)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강경(金剛經)처럼 비우고 또 비우는 내용을 설(說)하신

경전들은 재가불자들의 근기(根器)에는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재가불자들에게는 “선남자여 만일 한량없는 백(百)천(千)만억(萬億)

중생이 모든 괴로움을 받을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께서 그 음성(音聲)을 관찰(觀察)하고

모두 해탈(解脫)을 얻게 하느니라.

만약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사람은 혹 큰 화재(火災)를

당하더라도 불이 능히 그 사람을 태우지 못하나니

이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위신(威神)력(力) 때문이니라.

만일 큰물에 떠내려가게 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名號)를 부르면

곧 얕은 곳에 이를 것이며.........

의 내용을 설(說)하신 관세음보살 보문품이 적합(適合)할 것이다.

한국불교는 출가(出家)스님들은 수도(修道)하는 방법과 단계는

어느 정도 정립(定立)되어 있으나 재가(在家) 불자님들의 수행(修行)

방법과 단계는 아예 거론(擧論)조차 없다.

중구(衆口)난망(難望)식이다. 가르치는 스님에 따라 다르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자기가 공부하는 경전들을 추천하고 가르친다.

분명한 것은 출가스님들과 재가불자님들은 공부방법이 달라야한다.

스님들은 부모형제와 권력(權力)과 명예(名譽)를 모두 버리고

성불(成佛)을 목적으로 출가하신 분들이다.

스님들은 욕망(慾望)있어서도 안 되고, 욕심(慾心)을 부려서는 안 된다.

오직 버리고, 또 버리고, 또다시 버리는 수도(修道)를 하시는 분들이다.

비우고, 또 비우고, 완전히 비우는 무여(無餘)열반(涅槃)의 성불의길 을 수도(修道)를 하시는 분들이다.

재가 불자님들은 다르다. 버리고 또 버리면 세상사가 힘들어 진다.

비우고 또 비우면 삶의 대열에서 낙오(落伍)하기 싶다.

부처님도 이점을 염려(念慮)하신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最善)을 다하는 것을 설(說)하신 것이다.

수처(數處)작주(作主)라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이 되어 자유자재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이것을 수행(修行)이라고 한다.

출가스님들의 불교 수도(修道)와 재가불자님들의 불교 수행(修行)은

엄연히 다르다. 8만(萬)4천(千) 법문의 본질(本質)을 알아야한다.

대한민국에는 원조(元祖)시비(是非)가 자주 발생한다.

원조국밥집, 원조냉면집, 원조횟집, 등 간판싸움을 벌리다가 끝내는

법정(法廷)까지 끌고 간다.

대한민국에는 유사(類似)상품명(商品名)도 많다.

미원, 미풍, 박카스, 박탄D, 활명수, 가스 활명수, 이가탄, 인사톨.

무엇이 우선(優先)인지, 누가 원조인지 모르는 난형난제(難兄難弟)의 상품(商品)들이고 상품명(商品名)들이다.

대한민국에는 우습게도 불교에도 유사(類似) 종파(宗派)들이 많다.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이름은 앞뒤 전후(前後)로 장식(裝飾)한

이름 때문에 망신창이가 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이름도 안타깝게도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조계종(曹溪宗)이라는 본래 이름의 본질(本質)을 벗어난 것이다.

대한민국 불교는 조계종(曹溪宗)불교다.

조계종(曹溪宗) 우선 불교(佛敎)이다.

법문을 해도 조계종(曹溪宗) 스님이어야 한단다.

사찰을 찾아도 조계종 사찰 이어야 한단다.

영가 천도(遷度)재를 올려도 조계종 사찰, 조계종 스님이어야 한단다.

그것도 큰스님이 영험(靈驗)이 더 있단다.

큰스님도 비구니 스님은 안 되고, 비구스님이어야 된단다.

누군가의 가르침인지 몰라도 한참을 잘못된 가르침이다.

누군가의 장난인지 몰라도 너무 심한 폐습(弊習)이다.

물론 조계종(曹溪宗)스님들의 수승함에 존경을 올리면서 인정한다.

그러나 이 악습(惡習)은 조계종(曹溪宗)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全體)불교(佛敎)를 멍들게 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사찰(寺刹)들이 존재(存在)한다.

읍(邑),면(面),동(洞), 사무소보다 사찰(寺刹)수가 더 많다고 한다.

교회 숫자보다도 사찰(寺刹)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등록된 사찰보다 비 등록 사찰이 많다고 한다.

지금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사찰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불교 중흥(中興) 차원에 보면 바람직한 현상(現像)들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새로 생겨나는 사찰의 70~80%가 조계종(曹溪宗) 사찰임을

은연중에 강조(强調)하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한(大韓)불교(佛敎) 조계종(曹溪宗)에 등록(登錄)된 사찰(寺刹)은 5%도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조계종 인기(人氣)에 편승(便乘)하고자 재가(在家)불자(佛子)

들을 현혹(眩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처님 경전에도 없는 참혹(慘酷)한 일들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조계종(曹溪宗)이면 어떻고 조계종(曹溪宗)이 아니면 어떠한가?

불교 성직자(聖職者)라면 당당(堂堂)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재가불자라면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뾰족한 송곳날은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새파랗게 선 칼날은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미소 짓는 얼굴은 나도 모르게 편안(便安)함을 느끼게 한다.

일체(一切)만물(萬物)이 가지고 있는 기(氣)이다.

한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점 이상을 소장했던 달마(達磨)그림은

무슨 기(氣)를 가지고 있을까?

두 눈을 부릅뜬 험악한 얼굴의 달마 상(像)은 우선 공포심을 느낀다.

험악(險惡)하고 무섭게 그리는 달마(達磨)상(像)이 더 인기(人氣)란다.

토속신앙의 부적(符籍)으로도 이용되는 처용 상(像)을 닮기도 한다.

과당(過當)하기는 한말인가? 달마는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이다.

가람(伽藍)불교(佛敎), 강설(講說)불교(佛敎)를 배제(排擠)하고

선(禪)불교(佛敎)를 일어 키신 대선사(大禪師)가 만화(漫畵)가

되어버린 것 같다.

달마의 기(氣)는 청정(淸淨)함을 생명(生命)으로 한다.

과연 중생들의 욕망이 청정한 선기(禪氣)로 해결 될 수가 있을까?

오히려 세속(世俗)의 욕망과 청정(淸淨)한 선(禪)기(氣)가 서로

충돌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고 할지도 모른다.

다툼이 발생(發生)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차라리 함박웃음에 불룩한 배를 자랑하는 포대(布袋)화상(和尙)이

세속(世俗)중생(衆生)들의 삶에는 더 적합(適合)할지 모른다.

포대(布袋)화상(和尙)에서 발생하는 여유롭고 따뜻한 자비(慈悲)의

기(氣)가 더 불교(佛敎)적일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달마보다 포대(布袋)화상(和尙)상(像)을 모신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에 달마 광풍(狂風)이 불어 닥친 것일까?

부처님 경전에도 없는 기이(奇異)한 불교가 판을 치고 있을까?

정법(正法)불교(佛敎)를 외면한 상업(商業)주위(主位)에 무책임(無責任) 한 일부 상업방송과 철없는 불자님들의 부화뇌동(附和雷同)결과이다.

제대로 된 재가불자님들의 수행방법과 의식(意識)이 필요하다.

출가(出家)스님들이나 재가(在家)불자님들은 사찰(寺刹)을 치부(致富)의 수단(手段)이나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운영(運營)해서는 안 된다.

첫째도 중생구제요, 둘 채도 중생구제이다.

나는 능엄정사를 창건하며 정법(正法)불교(佛敎)구현(具顯)을 서원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중생들에게 재(財)보시(布施)로 회향하고,

배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법(法)보시(布施)로 회향하고

중생(衆生)과 더불어 서로의 두려움을 자비(慈悲)로서 감싸주는

무외시(無畏施)로 회향(回向)하는 것이 진정한 나의 서원(誓願)이다.

능엄정사 200여 평의 가람(伽藍)을 조성(造成)하면서 나는 무던히도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상가건물 200여 평을 마련하고 법당을 장엄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도 나는 집 팔고 약(藥) 팔아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재가(在家)법사(法師)라서 인지는 몰라도 법당을 확장(擴張)하고보니

시주(施主)는 고사하고 오히려 오던 불자님들마저 찾지 않았다.

“도와줄 형편은 못되고 법사님 혼자서 애쓰는 것 보니 미안해서

못 오겠다. 는 것이 그 이유이다.

결국 나는 단 한 불자님의 동참도 없이, 단 한 푼의 시주(施主)도 없이

혼자서 해결하는 괴력(怪力)을 발휘한 것이다.

그래도 괴력(怪力)의 원동력(原動力)은 항상 불심(佛心)이였다.

물질적(物質的)시주(施主)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안타까워하는

무외(無畏)시주(施主)는 나를 위로하는 큰 격려(激勵)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불보살(佛菩薩)님들이 나를 늘 가피(加被)하고 있었다.

나는 힘에 부치면 부처님께 매달린다.

밤을 새워가며 부처님께 하소연하고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부린다.

그리곤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을 받아낸다.

2005년 이른 봄에 있었던 일이다.

위태(危殆)위태(危殆)하든 능엄정사 천장(天障)이 말썽을 부렸다.

능엄정사가 입주(入住)전(前)부터 우천(雨天)시(時)빗물이 천장(天障)으로 스며들어 방바닥에 물(水)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관리소 측에서 보수(補修)해주기로 약속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보수를 미루더니 이제는 3M높이의 천장이 내가

지나가면 머리에 닿을 정도로 내려앉아다. 붕괴(崩壞)직전이다.

당연히 아파트 관리소 측에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보수(補修)를 해

받아야 함에도 성직자(聖職者)라는 신분 때문에 인욕(忍辱)해야 했다.

그렇다고 능엄정사에서 보수(補修)를 하자니 1200만원에 가까운 많은 공사비 견적(見積)이 나왔다.

능엄정사 불사(佛事)경비(經費)는 전액 내가 조달(調達)해야 한다.

수리(修理)비용(費用)을 마련할 길이 없는 나는 위험(危險)부담(負擔)을

앉고 경비를 마련할 수 있는 부처님 오신 날 까지 미련을 대고

살수밖에 없었다. 위험천만(危險千萬)의 대(大)모험 이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모든 책임을 부처님께 전가(轉嫁)하고

나는 오직 신묘장구대다라니에 전념하고 있었다.

2005년 음력 2월 보름날 축 내려앉은 천장(天障)에서 목탁소리 보다

더 큰 뚝 두둑.......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도 배짱 좋게

보름정기(定期)법회(法會)를 올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천장은 더 큰소리를 울리며 나를 찾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삼매에 빠져들고 있었다.

순간 뚝, 뚜 뚝!

하는 큰소리함께 내 가슴을 철렁 내려 안게 하는 사고가 발생 했다.

걱정이다. 그렇다고 기도 중에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불보살님들이 해결하시겠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천장이 무너져라! 애써 외면하고.

목탁이 깨어져라! 힘껏 내리치고.

목청이 터져라! 고 소리 높여 외쳐대며 삼매(三昧)를 불러들이는데

흰옷 입은 백의(白衣)의 여인이 나의기도 삼매(三昧)속을 찾아들었다.

백의(白衣)의 보살님이 축 처진 천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나와 능엄정사 불자님들의 기도에 불보살님들이 감응하신 것이다.

나는 백의(白衣)의 보살님이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믿고 싶었다.

기도를 마무리하고 불자님들을 피신시키고 목수를 불러 법당 안을

살펴보니 희유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능엄정사 법당 연등(燃燈)에는 각각(各各)등(燈)마다 밑자리에

한자(字) 한자(字)의 법성게(法性偈) 글자(字)로 장엄하고 있었다.

가장 많이 처진 자리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법(法)자(字)가 위치한 곳인데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의

중(衆)자(字)와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의 불(佛)자(字)로

연결된 흰색 전선(電線)이 버터주고 있었다.

전선은 연등에 불을 밝히는 전선인데 목수가 전선을 잘라내자

일시(一時)에 천장이 우르르 붕괴(崩壞)되었다.

참으로 아찔한 위기를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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